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슬퍼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자이며,
동시에 돈이나 권력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랑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충분한 증거야.
그렇다면 용기는 철학자에게만 특별히 존재하는 성품이 아닐까?
절제도 마찬가지야. 일반 대중들도 절제는 정욕을 다스리고 누르는 것이며
정욕보다 탁월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절제도 오직 육체를 경멸하고 철학하는 생활을 하는 자에게만 속하는 덕이 아닌가?
자네가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절제를 고려해 보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모순된 것임을 알게 될 거야.
자네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커다란 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 용감한 사람도 보다 큰 악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오직 공포 때문에,
다시 말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용감한거야.
그리고 절제도 마찬가지 경우가 아닌가?
사람들은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절제를 원하는 것이야.
그들에게는 잃어버리기 싫은 쾌락이 있고,
이 쾌락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몇 가지 쾌락을 삼가는데
이는 다른 쾌락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야.
결국에 더 큰 쾌락을 위해, 작은 쾌락을 절제하게 된다는 것이지.
그렇지만 어떤 공포나 쾌락이나 고통을 마치 화폐처럼 다른 공포나 쾌락이나 고통과 바꾸고,
또 보다 큰 것을 보다 작은 것과 바꾸는 것은 옳바른 교환이 아니야.
오, 축복받은 심미아스, 모든 사물을 교환 할 수 있는 참된 화폐가 하나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지혜야.
이러한 지혜와 바꿀 때에만,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가져야만
용기든, 절제든, 정의든, 무엇이든지 참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거야.